서울시립대신문은 지난 겨울 방학 서유럽의 작은 국가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3국을 취재 차 다녀왔다. 우리에겐 사회 교과서 속 ‘베네룩스’라는 이름으로 더 익숙한 이곳. 이번 한 학기 동안 12면에서는 해외 취재로 다녀온 세 나라에 대한 이야기를 담는다. 세 나라를 다 합쳐도 남한 크기 정도에 불과한 작은 나라들이 어떻게 선진국으로 성장했을까. 건축, 디자인, 미술, 국제 협력 등 각 국가의 강점을 담은 기사와 관광지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세 나라의 매력을 담은 여행 기사를 연재한다.  -편집자주-

 
낯섦, 이상함, 불규칙, 비정형. 현대 건축을 대표한다고 하는 네덜란드 건축물의 첫인상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했다. 도시 곳곳에는 서울의 도심에서 만나보던 직육면체의 나란한 건물들 대신 어딘가 불안감을 주는 건물들이 가득했다. 하지만 낯선 것이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기자는 그 낯섦에서 현대 건축의 현재와 미래를 만나고 왔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현대 건축의 선두주자가 됐을까. 이 기사는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상상 속 건축이 현실이 되는 곳, 로테르담

로테르담의 첫인상은 강렬했다. 기차로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게 될 중앙역사의 외관 때문이었다. 건축의 도시임을 뽐내는 듯 한쪽이 삐죽 솟은 모양의 중앙역은 작년 3월 완공된, 말 그대로 ‘새’ 역사다. 리모델링이 진행되는 10년 동안 역의 외관을 비롯해 주변 환경까지 모든 것이 바뀌었지만 역 밖의 ‘Centraal Station’이란 글자와 시계는 역사가 처음 세워졌던 1957년에 제작된 것을 그대로 가져와 걸었다.

로테르담 중앙역 대개 도시의 중앙역은 오래된 건물 그대로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로테르담의 경우 늘어나는 이용객을 수용하기 위해 2004년 본격적으로 리모델링을 시작했다.
조금 더 시내로 들어와 뉴 뫼즈(Nieuwe Maas)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건축에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단번에 시선을 사로잡힐 만한 독특한 건축물들을 여럿 만나볼 수 있다. 블럭을 쌓다 흐트러진 듯 엇갈린 모양의 ‘더 로테르담(De Rotterdam)’, 유니레버 본사 등 여러 유명 건축물들이 반경 2km 내에 집약적으로 모여 있다. 이 외에도 로테르담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극장이나 터미널, 미술관, 박물관 등도 세계적인 건축물의 반열에 든다.

큐브하우스 여러 개의 정육면체를 이어 만든 모양으로 로테르담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은 곳 중 하나다. 주변에는 로테르담 공공 도서관, 펜슬하우스, 마르트할(Markthal) 등이 있다.
대개 1940년대 이후로 재건됐거나 신축된 로테르담의 건축물들은 그 이면에 아픈 전쟁의 상처를 안고 있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희생자 수를 집계할 수 없을 정도로 도시가 초토화됐던 곳이다. 도시에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보니 도시를 재건하는 과정에서 여러 건축가들이 내놓은 실험적인 설계를 수용할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계획성 없이 만들어진 신도시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서도 ‘공공성’이란 규칙은 존재한다. 규칙은 다음과 같다. ‘다른 건물을 시각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가로막지 않을 것.’

쿤스트할 판 뵈닝헨 미술관과 자연사 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은 공원처럼 조성했다. 여러 건물이 모여있음에도 여유있는 경관을 구성한 건 주목할 점이다.
이를 충실하게 실천하고 있는 건물이 바로 로테르담을 대표하는 현대미술관 ‘쿤스트할(Kunsthal)’이다. 쿤스트할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건축가 렘 콜하스의 작품으로 자연사 박물관, 판 뵈닝헨 미술관과 함께 로테르담의 손 꼽히는 명소다. 찾는 사람이 많아 붐빌 법도 하지만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입구가 나 있고 각 건물의 위치 역시 다른 건물을 전부 가리지 않도록 조금씩 엇갈려 있다. 그렇기 때문에 로테르담을 처음 방문하는 여행객이라 하더라도 건물 모양만 알고 있다면 쉽게 찾아올 수 있다.


 
땅도 건물도 낮은 오래된 수도, 암스테르담

도시를 새롭게 정비하는 과정에서 현대 건축이 대규모로 발달한 로테르담과 달리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오히려 옛 모습을 제법 잘 간직하고 있다. 도심 가득 초고층빌딩이 빼곡이 들어선 서울과는 전혀 다른 인상의 수도였다. 지난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는 운하를 따라 펼쳐지는 암스테르담은 마치 17세기의 유럽과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을 중심으로 뻗어 나간 운하 주변에는 5층 남짓의 폭이 좁은 오래된 건물들이 자리해 있다. 17세기 네덜란드가 상업으로 호황을 누렸을 당시 운하 주변에 집을 지으려는 경쟁이 심해지자 정부에서 폭 8m 이상, 5층 초과, 창이 3개 보다 많은 건물에는 높은 세금을 부과한 결과다. 이러한 기조는 지금까지 이어져 4세기가 지난 지금도 암스테르담에서 고층 건물을 찾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고층 건물이 쉽게 들어서지 못하는 또 다른 이유는 낮은 해발고도 때문이다. 네덜란드(Neder+land)라는 국명 역시 ‘낮은 땅’이라는 뜻으로 암스테르담 스키폴 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할 때면 안내화면에서 ‘-8m’의 수치를 볼 수 있을 만큼 해발고도가 낮다. 고층 건물을 지으려면 안정성을 위해 땅을 깊게 파야 하는데, 땅을 조금만 파도 물이 나오다보니 비교적 최근에 매립한 암스테르담 북쪽 지역이라 하더라도 외관이 독특한 건물들이 몇 개 있을 뿐 5층을 넘는 건물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 8000점에 이르는 작품을 다시 배치하고 인테리어를 정비하는 등 내부의 모든 것이 탈바꿈됐지만 미술관이 간직하고 있는 깊이와 역사는 여전했다.
암스테르담의 대표적인 관광지인 네덜란드 국립미술관(Rijksmuseum)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난 2013년, 10년 동안의 긴 리모델링을 마치고 다시 대중들에게 개방된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은 1885년 지어진 모습 그대로, 암스테르담의 여느 건물들이 그렇듯 5층 높이의 외관을 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국립미술관은 소장 작품의 규모와 수준 때문에 명성을 떨치기도 했지만 세계의 여러 국립미술관 중 유일하게 휴관일이 없는 미술관이기도 하다. 쉬는 날이 없다보니 평일과 주말 가릴 것 없이 미술관 앞 뮤지엄 광장과 미술관 안에 위치한 카페는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로 붐빈다.


렘 콜하스가 추구하는 공공성, 참여형 건축물의 시작

로테르담의 쿤스트할과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에서 볼 수 있듯 미술관이 시민들의 공원이자 휴식처처럼 기능할 수 있는 것은 네덜란드의 건축이 추구하는 공공성 덕분이다. 각기 다른 역사와 도시 경관을 가지고 있는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이지만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건물의 공공성을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닮아 있다.

이는 네덜란드에 존재하는 국가 건축가 제도의 영향이기도 한데, 국가 건축가는 국가의 모든 건축물에 대해 자문의 역할을 맡는다.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국가 건축가를 맡아온 렘 콜하스는 건축물이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보고 가급적 ‘비어 있는’ 개방적 공간을 추구했다. 건물의 기능을 규정하지 않고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에 따라 여러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TU Delft 도서관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미술관이나 도서관 등은 꼭 특수한 목적이 있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찾을 수 있는 휴식의 공간이 된다.
대표적인 예가 네덜란드 건축 교육을 이끌고 있는 델프트 공과대학교(TU Delft)의 도서관이다. 이 도서관은 대지와 건물이 단절되지 않게 건물을 유선형으로 설계하고 외부를 잔디로 뒤덮어 산책로, 썰매장 등 체육공간으로도 이용할 수 있게 했다. 도서관의 의미를 ‘책을 보고 공부하는 곳’에 가둬뒀다면 불가능했을 건물이다. 

네덜란드의 이러한 건축관에 흥미가 간다면 렘 콜하스가 설계한 한남동의 ‘리움’미술관과 서울대학교 미술관 ‘MoA’ 답사를 추천한다. 두 건물은 모두 경사길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특성을 이용해 층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전체적인 건물의 높이를 낮춤으로써 편안하게 둘러볼 수 있도록 설계돼있다는 점에서 쿤스트할과 닮아있기도 하다.

리움 입구를 경사로로 설계해 미술관이 항상 열려있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는 인상을 준다.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 소재. 매주 월요일 휴관.
이렇듯 네덜란드의 건축은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각 건물의 개성을 존중하되 시민들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기능적으로 열려있는 공간을 구축해왔다. 서울처럼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서지 않기 때문에 새로 들어오는 건물 때문에 조망권이나 일조권을 침해당할 일도 생기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토지면적, 비슷한 수준의 높은 인구밀도에도 이처럼 ‘탁 트인’ 도시를 설계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네덜란드에 평지가 많아서만은 아닐 것이다. 고층빌딩에 연연하며 경쟁하듯 층을 쌓아 올리는 마천루의 시대. 앞으로의 건축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인간이 중심이 되는,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네덜란드의 길이 아닐까.  

글·사진_ 장한빛 기자 hanbitive@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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