룩셈부르크라는 이름은 흔히들 들어봤을 것이다. ‘룩 룩 룩셈부르크’라는 노래가사를 통해서든, GDP 세계 1위의 국가로서든, 아니면 베네룩스라는 명칭에 끼워진 나라로서든 말이다. 하지만 여행지로서의 룩셈부르크는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생소할 수 있다. 조금은 낯설 수도 있는, 숨은 보물 같은 ‘여행지’ 룩셈부르크를 소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네덜란드에서 벨기에, 그리고 룩셈부르크로 우리의 여정은 이어졌다. 룩셈부르크로 떠나기 전날 밤, 한 가지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시간여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각 나라는 꽤나 다른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베네룩스로 묶이는 세 나라기 때문에 공통점이 많을 줄 알았는데 실제로 경험해보니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비행기 속에서 처음 마주한 네덜란드는 현대적인 도시였다. 중앙역을 중심으로 잘 정돈된 길, 밤이 돼도 밝게 빛나는 거리, 그리고 기괴하게 생긴 건물들까지… 일정이 계속되고 우리가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이 도시적인 모습은 희미해졌다. 도시의 불빛은 점차 약해지고 마을들은 점차 소박하고 아늑한, 전형적인 유럽 마을의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룩셈부르크는 우리의 일정 중에서 가장 남단에 위치한 곳이네. 지금까지의 경험에 비춰보자면 룩셈부르크는 옛 모습을 잘 간직한, 유럽 마을의 정수(精髓)를 보여야 할 것 같은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다음날 룩셈부르크로 향하는 기차 안. 예상했던 대로 현대적인 도시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었다. 그저 넓은 들판에서 뛰노는 양과 말이 보이고, 작은 마을 몇 개가 보일 뿐이다. 내 예상이 맞은 걸까.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지어진다.


 
약간은 삐걱거린, 외국에서 맞이한 새해

룩셈부르크에 도착한 것은 14년의 마지막 날이었다. 암스테르담, 브뤼셀에 비해 한적해 보이는 이곳을 감상하기도 잠시, 여행책자에서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이곳은 1월 1일에 대부분의 가게들이 문을 닫고, 12월 31일에도 문을 일찍 닫는다는 것이다.

외국에서 맞는 새해. ‘그냥 잠들긴 아쉽지’ ‘샴페인이라도 터뜨리자’ 따위의 계획을 세워놨지만 우리는 아직 저녁식사도 해결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중앙역 근처에 있던 유명한 빵집에서 근사한 케이크를 사기로 한 계획은 물 건너가고 급한 대로 아직 문을 닫지 않은 마트와 빵집에서 이것저것 담아온 뒤 숙소로 돌아갔다. 한적한 도시의 모습에 대한 로망은 뜻밖에 겪게 된 약간의 불편 탓에 사라져갔다.

하지만 계획이 조금 틀어졌으면 어떤가. 계획대로 착착 맞아떨어지는 여행도, 예상을 벗어나며 계획에서 틀어지는 여행도 각각의 재미가 있는 법이다. 숙소로 돌아온 후 먹을 것들을 늘어놓은 채 지난 여행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우다보니 어느새 짜증은 사라지고 시간은 훌쩍 흘렀다. 새해를 맞이하기까지 약 30분 정도 남은 시점이었다.

한국과는 8시간 정도 시차가 나는 터라 SNS는 이미 새해인사로 가득 찬 상황. 서로 ‘어떻게 더 오글거리는 새해인사를 올릴까’ 깔깔대다가 문득 밖이 소란스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한적하기만 했던 거리였지만 어느새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3. 2. 1. 시계가 2015년이 찾아왔음을 알리자 거리로 나온 사람들은 연신 폭죽을 쏴 올렸다. 숙소에서 뒹굴거리던 우리들도 거리로 나와 폭죽을 구경했다. 거리는 밤안개와 화약연기가 섞여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한국이 아닌 타지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새해는 이처럼 강렬했다.


 
비안덴, 룩셈부르크의 숨은 보물

나름 흥겨웠던 밤을 보낸 다음날, 우리는 ‘비안덴’이라는 곳으로 향했다. 비안덴은 프랑스의 대문호(大文豪) 빅토르 위고가 사랑했던, 천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마을이라고 한다.

비안덴은 룩셈부르크 중앙역에서 ‘에텔부르크’라는 곳으로 간 뒤 다시 한번 버스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작은 마을이다. 어젯밤부터 이어졌던 자욱한 안개 탓일까. 어제의 흥은 온데간데 없고 차분함이 온 마을을 에워싸고 있었다. 여행 중 그토록 맑은 날을 갈망하던 나였지만 이날만큼은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안덴은 흐린 날과 잘 어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자욱한 안개는 비안덴 성과 집들을 조금씩 감추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하지만 이 짖궂은 안개도 비안덴 성의 모습을 모두 가릴 수는 없었다. 비안덴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커다란 성. 우리는 이곳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실 케이블카를 통해서도 비안덴 성을 갈 수 있지만 뭐랄까, 이처럼 한적하고 아름다운 마을을 충분히 즐기지 않은 채 스치듯 지나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일단 걷기 시작했지만 성을 향해 가는 길은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리는 ‘XX번지의 집 오른쪽으로 난 샛길을 통해 걷다보면 성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어제 밤에 인터넷을 통해 찾아본 사실을 이용해 길을 찾아갈 뿐이었다. 보물찾기라도 하자는 것일까. 짜증이 날 법도 하지만 이보다는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XX번지의 집을 찾고 비안덴성을 향한 길을 찾아 질척질척한 산길을 걷고 있을 때는 마치 ‘숨겨진 보물을 찾아 여행하는’ 사람이라도 된 듯 발걸음이 경쾌했다.

마침내 도착한 비안덴 성. 안타깝게도 1월 1일에는 개방을 하지 않는단다. ‘힘들게 올라왔는데 들어갈 수 없다’는 아쉬움을 느낀 것도 잠시, 우리는 비안덴 성 주변에서 내려본 비안덴의 풍경을 보며 피로를 달랬다. 비안덴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빽빽이 나무가 심어진 숲, 그리고 그 안에 수줍은 듯 위치한 작은 집들의 군락. 비안덴은 내가 상상해왔던, 유럽의 마을과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구 시가지를 만끽하고 멋진 마무리를 경험하다

짧게나마 비안덴을 둘러보고 룩셈부르크로 돌아왔다. 우리는 숙소가 아닌 구(舊) 시가지로 향했다. 일행의 말에 따르면 우리가 묵고 있는 곳은 신(新) 시가지의 외곽이고, 버스를 타고 조금 더 들어가면 어젯밤 사진으로 봤던 거대한 절벽과 또 다른 시가지가 펼쳐지는데, 이곳이 바로 구 시가지라고 한다.

구 시가지를 향한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시야가 탁 트였다. 깎아지른 것 같은 절벽과 절벽 사이를 잇는 다리 위에서 내린 탓일 것이다. 꽤 규모가 큰 절벽 아래에는 유럽의 옛 모습이 보존된 듯한 구 시가지가 펼쳐졌다.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잘 보존된 구 시가지를 ‘만끽’하기 위해 내리막길을 걸었다.

구 시가지를 향해 내려가는 길. 거듭 장관(壯觀)이 펼쳐졌다. 확실히 산, 절벽 등 대지의 높고 낮음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경험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웅장한 자연의 모습과 함께 이질적인 외래의 건축물들이 어우러져 신비한 느낌을 줬다. 곳곳에 심어진 나무들만 이파리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면 더더욱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뭐가 어쨌든 상관없다. 다리가 아프고 조금 쌀쌀하긴 하지만 이것이 대수랴. 한없이 걷고 싶어지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

정신을 차려보니 해는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한기(寒氣)는 점점 더 내 몸을 옥죄어왔다. 아쉽지만 내일을 기약하며 숙소를 향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숙소에 들어가기 전, 일행 중 누군가가 우리의 발걸음을 신 시가지로 이끌었다. 룩셈부르크에 왔다면 왕궁 앞에 있는 ‘chocolate house’에 꼭 한번 방문해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신 시가지라고는 하지만 높은 빌딩보다는 옛스러운 벽돌 건물들이 우리를 반긴다. ‘모순적인 표현이 아닌가’라며 혼자 되뇌었고, 또 옛 건물들이 잘 보존된 모습에 감탄했다. 주변에서 저녁을 해결하고 ‘헌법광장’, ‘황금여신상’ 등을 천천히 둘러본 후 여행을 마무리하고자 chocolate house로 향했다. 네모 모양으로 굳어진 초콜릿에 익살맞게 꽂혀진 나무 숟가락. 따뜻한 우유에 이 초콜릿을 녹여먹으며 짧았던 룩셈부르크의 여행을 정리했다. 아늑한 조명 아래서 천천히 되새겨보는 여행의 기억은 초콜릿만큼 달콤했다.

이후 5개월이 지난 지금, 다시금 룩셈부르크 여행을 반추(反芻)해본다. 19일간의 베네룩스 여행 중 네덜란드에 9일, 벨기에에 8일을 할애했다. 룩셈부르크는 고작 2일만을 묵었을 뿐이다. 하지만 룩셈부르크의 존재감은 ‘고작 2일짜리’로 치부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인상을 남겼다. 혹시나 누군가 유럽의 옛 모습을 만끽하고 싶어 유럽여행을 떠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룩셈부르크를 추천할 것이다.

글_ 김준태 기자 ehsjfems@uos.ac.kr
사진_ 장한빛 기자 hanbitive@uos.ac.kr
서현준 객원기자 ggseossiwkd@uo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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